
세종대왕은 1397년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도(祹)이고, 자는 원정(元正)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나라가 안정되던 시기에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왕위를 양위 받았다. 세자였던 맏형 양녕대군의 하차로 22세(1418년)로 전격 왕세자에 책봉됐다. 두 달 만에 조선의 제4대 왕으로 등극한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지배 대상이 아닌 보호와 교화의 대상으로 봤다. 평생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편안함을 위해 섬김의 리더십을 실천한 왕이다. 집현전을 설치해 학문을 숭상하고 한글을 창제했으며 최윤덕과 이종무를 시켜 쓰시마(대마도) 섬을 정벌하고 북으로는 4군과 6진을 개척했다. 자격루와 옥루, 측우기 등을 발명해 나라의 과학발전을 더 높였다.
지난 9일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57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은 ‘한글 창제’다. 한글은 소리로 뜻을 분별하는 소리글자로 누구나 쉽게 습득할 수 있다. 한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군주가 백성의 쉽고 편안한 문자 생활을 위해 직접 만든 문자다. 그 문자를 만든 이유와 근본 취지를 밝히는 유일한 문자이기도 하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친히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의 도움으로 1443년에 창제했다. 3년 후에 반포한 28자로 된 글자의 명칭이다. 최만리 등 일부 집현전 학자들의 한글 사용 반대에 직면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조정의 공문서에서 한글을 사용했고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과거 시험 과목에 훈민정음을 넣기도 하면서 한글 보급에 힘을 쏟았다.
세종대왕은 신하들과 직접 경연을 베풀었던 학자이자 논객이다. 1418년 왕이 된 지 두 달만인 10월에 처음으로 경연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독했다. 이후로도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해 여러 번에 걸쳐 강독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을 200명까지 넓혀 인재의 등용을 넓혔다. 정몽주와 길재를 『삼강행실도』 『충신편』에 넣어 그들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해 교육하게도 했다. 또한 노비의 출산 휴가를 확대해 90일까지 허용하도록 했고 노비도 천민(天民)이라 했다. 아울러 10세 이하와 80세 이상은 사형죄를 금하게도 했다.
세종대왕은 농학·문학·언어학·음악·수학·과학·경제학·천문학·군사학 그리고 인권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수준을 세계 최고로 높인 군주였다. 15세기 전 세계를 통틀어 그의 재위 기간 32년에 견줄만한 나라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오늘날 한류의 결실과 성공도 600여 년 전 세종대왕이 기초를 마련한 결과물일 것이다. 자칫 중국에 대한 사대를 의식해서 우리를 스스로 낮게 보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세종대왕 시대에도 양반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한문을 높이고 한글을 언문(諺文)이라며 업신여겨 위대한 한글이 사라질뻔했음을 우리는 각성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왕들과 달리 세종을 대개 세종대왕이라 부른다. 그는 애오라지 애민‧교육‧ 계몽의 왕이었다. 세종대왕은 리더로서 모범을 보이며 학자들과 함께 고락하며 한글을 창제했다. 또한 백성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 왜구의 침입을 원천 봉쇄했으며 북쪽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우리의 영토로 확보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에서 가장 위용이 있는 전투함을 세종대왕함으로 일컫는 이유도 그의 국방에 대한 혜안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대왕급인 이지스 구축함은 현존하는 세계 최강의 꿈의 구축함으로 적의 어떤 공격도 막을 수 있는 전투함이다. 나라가 어려움에 직면할수록 세종대왕의 리더십이 더욱 그립기만 하다.
<한국대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