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도 활용하시는 하나님 시37:23-26
- 몇 주전인가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대표 기도 순서가 되어 담당자가 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많이 놓치는 발음이 “와”와 같은 복모음이 아닌가? 아픈 환우를 위해 기도하는 대목이었는데 환 발음을 위해 근육을 좀 덜 쓰셨다. 병상의 환우로 발음해야 할 것을 “병상의 한우”가 되었다. 11시 예배라 슬슬 출출해져 가는 차에 병상의 한우라고 하니, 그 후부터는 소고기 생각에 잠간 사로잡히며 속으로 웃었던 기억이 있다. 병상의 환우뿐 아니라 한우로 다 나아서 모두 건강하면 좋지 않겠는가? 환우든 한우든 아프지 않길 기도한다.
- 예전에 한 교회에 행정 수석 부목사로 섬길 때다. 교회 앙상블 팀에서 관악기를 부시던 오 모 집사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담임목사님을 모시고 고인을 모신 장례식장에 갔다. 조용한 성격의 그분은 주변에도 많이 소식을 알리지 않았는지 조문객도 많지 않았다. 위로 예배를 드렸다. 담임목사님께서 인도하셨다.
- 주로 부르는 곡이 있지 않는가? 하늘 가는 밝은 길이/저 높은 곳을 향하여 등등. 그런데 그날은 잘 모르는 곡을 고르셨다.좀 더 세게 말하면 거의 처음 불러보는 곡 같았다. 목사님이 아시니까 고르셨겠지…그런데 사람도 적고 한데 찬양 소리가 너무 작았다. 악보를 대충 보니 아는 음이 하나 보이는 것 같았다. 순간 그 부분을 크게 불렀다. 괜히 돕겠다고 오버한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음은 모르겠더라.
- 담임목사님도 같이 음을 잃어버렸다. 갈 길을 잃어버린 찬송가가 되어 버렸다. 급기야 웃음이 터졌다. 장례식장에서. 그것도 얼마 사람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담임목사님, 그 순간 지혜롭게 수습하셨다. 정확한 표현은 잊었지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음이 틀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불렀다.
- 나는 그 곡이 끝날 때까지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상주는 누구라고 했는지 기억하는가? 바로 관악기를 전공한 음악가였다. 음악가의 장례식장에서 두 목사는 음을 잃은 찬송을 불렀던 것이다. 그 오 집사님은 그럼에도 웃지 않으셨다.
-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렇게 실수할 때에도 힘이 되어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실수를 모른 척하지 않으시고, 결국은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이리라.
- 지금은 은퇴하신 분이지만, 서울 연동 교회를 담임하셨던 이성희 목사님이라고 계시다. 이분의 아버지는 대구제일교회를 담임하셨던 이상근 목사님이기도 하시다. 그분이 한번은 러시아로 꽤 오래 전 집회를 가셨다고 한다. 차에다 원고가 든 가방을 놓고 저녁 집회 전 근처에 식사를 하러 가게 되셨다고 한다. 그런데 돌아와서 보니 차량이 도둑을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가방도 같이 없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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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물건은 놔 두고서라도 곧 시작할 집회의 원고가 사라졌기에 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이분은 철저히 원고 중심의 설교를 하시던 분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짧은 설교도 아니고 그런 집회에는 1시간도 갈 수 있는 설교였고 러시아어로 통역을 해야 하는 설교인데 원고 없이 통역을 하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 시간이 없는데 방법이 없지 않는가? 성령님께 간구했다고 한다. "하나님, 이제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제 입술을 주관해 주십시오." 원고 없이 오직 성령님께만 의지하여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은혜로운 메시지가 선포되었다고 한다. 농담삼아 어떤 분은 원고 있을 때보다 없을 때가 설교가 더 좋았다는 말했다고 한다.
- 가방을 잃어버린 것이, 도둑을 맞은 것이 실수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비틀거리듯, 발을 삐걱거리듯 난감한 경우를 만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럴 때, 하나님은 목사님의 손을 붙잡아 주셨고 그 결과 넘어지지 않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적용해도 된다: 여러분,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거기에서 잠시 길을 잃어도, 잠시 힘을 잃어도, 잠시 방향을 잃어도 주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신다는 것이다.
- 길게 보는 안목도 필요한 것 같다. 짧게 보면 버림받고, 가난하여지고, 초라해져 보이는 우리의 시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25절의 고백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약속이다: 나는 젊어서나 늙어서나 의인이 버림받는 것과 그의 자손이 구걸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이 말은 결국 의인이 승리한다는 말이요, 결국 옳은 길을 택한 자가 택함받고 베푸는 자가 배불러진다는 말이 되겠다.
제가 이성희 목사님만큼 대단하지는 못하지만, 저도 최근에 그런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길 바란다. 4월 마지막 주에 원주에 있는 연세대학교 미래 캠퍼스 채플 강사로 다녀왔다. 약 2년 전에도 갔었는데 이번에는 하루 전에 밤에 도착해서 자고 아침부터 3회에 걸친 메시지를 전했다. 그곳은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연대 본교와 달리 12회 중 9회를 현장 채플로 운영하고 있었다.
- 개인적으로 그 주간에는 안 하던 특강부터 해서 연휴를 앞두고 일이 겹쳐 있어서 오후 늦게서야 원주로 출발했고 밤 10시가 넘어서 원주 숙소에 도착을 했다. 마침 또 간식거리를 주셔서 먹고 설교 원고를 보았는데 “뭔소리인지 내가 모르겠더라!” 설교자가 설교하기 힘든 곳 크게 2곳 꼽으라면 하나는 신학생들 앞에 서고, 또 하나는 대학 채플이다. 너무나 날카롭게 들어서 힘든 곳이 전자라면 너무나 안 들어서 힘든 곳이 후자다.
- 그런데 원고의 흐름이 너무 산만한 거다. 이렇게 산만하면 학생들은 더 산만해 질텐데. 그리고 도통 무슨 맥락으로 이런 저런 영상을 준비해서 보냈는지 제가 이해가 안 되었다. “야 이거 고기 먹기로 했는데 밥값도 못하고 돌아오는 거 아닌가?” 순간 걱정이 들었다. 원고를 다시 손으로 고치고 나서는 다시 프린트할 수도 없어서 외우다시피 읽고 또 다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기도하고 기도했다.
- 그렇게 다음날 첫째 시간을 마쳤다. 어디나 약간 용기 있고 엉뚱한 학생이 있는 법. 첫번째 시간이 끝나고 그곳 교목실장님과 같이 앉아서 담화를 나누며 쉬고 있는데 그런 한 친구가 찾아왔다. 이층에 앉았는데 부모님 이야기는 “눈물 치트기”라면서 제 주변에 앉아있던 아이들도 울었다는 거다. 망하지는 않았다는 반증 아니겠나?
- 여기의 핵심은 제가 설교를 잘했다 이런 거 아닌 것 아시지 않는가? 오늘 본문의 내용이 핵심이다: 우리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걸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고, 우리의 입술을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신다는 것이다.
- 우리의 실수와 우리의 연약함도 들어 쓰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우리가 실수할 때, 우리가 흔들릴 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여 그럼에도 쓰러지지 않고 넉넉히 승리하는 우리 모든 계명문화가족이 되길 축복한다. 아멘
하나님,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뢰합니다. 때로 비틀거리고 때로 길을 헤매도 결국은 빛으로 소망으로 올바른 데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은혜를 베풀고 만복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