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포항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일로 기억한다. 어렴풋한 기억은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집들이 규칙적으로 붙어서 놓여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집집마다 문패라는 걸 내다 걸어 놓은 데가 많았는데 주로 한자로 쓰여진 문패를 보고 아는 한자 나오면 친구들이랑 읽으면서 집에 갔던 기억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런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늘 학구적으로만 하굣길을 다니진 않았다. 연식이 계속 나오긴 하는데 그 당시에는 연탄 보일러를 주로 때던 때라 하얗게 변한 연탄을 대문 옆에 쌓아 놓기도 했다. 그렇게 쌓아놓은 연탄을 밟아서 부서뜨리는 쾌감을 즐겼다.거기에 더 나아가 재미를 더하였는데 그렇게 부서뜨린 다음에 벨을 눌렀다. 그리고 주인이 나오기 전에 도망갔다. 천하의 나쁜 놈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원인은 모르지만 한 집에서 그렇게 하다가 주인한테 걸렸다. 그리고 그 집에 몇몇이 끌려 들어갔다. 소파 같은 데 앉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머리가 허연 한 분의 일장 연설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그분이 은퇴하신 교장 선생님이었다는 것이다.전형적인 교장 선생님의 꼬장꼬장한 일장 훈계를 듣고 다행히 무사히 풀려났던 기억이 난다. 그후로 연탄 부수고 도망가는 행동은 멈추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제 인생에서 그렇게 용서받을 만한 일은 다시는 없었을까? 절대적으로 아니다. 그럴 리가! 물론 남들은 알지 못하는 잘못일 수 있다. 그러나 나한테 죽을 때까지 용서는 여전히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잡혀 예수님 앞으로 끌려온 여인 이야기가 나온다. 그 당시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던 사건이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예수 당신은 어떻게 하겠냐는 투였다. 예수님이 이 요청에 말없이 땅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재차 답을 하라고 요청했고 거기에 예수님이 바로 유명한 말을 하셨다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땅에 글씨를 쓰셨다.한 성경 해석에 따르면 땅에 뭔가를 쓴 것은 바로 모인 사람들 각각의 죄목을 썼다는 주장이 있다.또 그렇게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고 고개를 숙인 것은 그 사람들의 자존심을 고려하여 눈을 안 마주치고자 한 예수님의 배려라고 보기도 한다.
예수님의 사랑은 정의와 배려가 어울려 있는 예술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는 방법도 그와 같고 우리가 배워야 할 기독교적 가치관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미국 뉴욕 지역을 대표하는 공항으로 JFK 국제 공항과 더불어 국내선 전용인 라과디아 공항이 있다. 뉴욕 시장이었던 피오레로 라과디아(Fiorello Laguardia)씨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시장을 하기 전에는 즉결 사건을 담당하던 판사였다고 한다.
그의 판사 시절 이런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1935년 미국 대공황시의 추운 겨울 한 할머니가 배고파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할머니의 딸은 아파 누웠고, 사위는 도망 가고 너무 배고파 하는 두 손자를 보고 할 수 없이 빵을 훔쳤다.라과디아 판사는 10불이나 혹은 10일간의 옥살이 벌금형을 내리면서 이렇게 선고문을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노인의 범죄에는 나도 상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렇게 불쌍한 노인이 먹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하는 동안 나는 너무나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10불은 제가 내도록 판결을 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중절모자를 벗어 10불을 넣어 법정 서기에게 주면서 말을 이어갔다 한다.“그러나 동시에 여기 계신 마을 분들도 무죄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모두에게 50센트 이상의 벌금을 선고하는 바입니다. 저의 지불로 피고는 벌금을 해결하지만 여러분의 벌금은 이 분의 새로운 삶을 격려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렇게 누군가의 용서와 대속의 은혜로 우리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본다. 정의와 배려가 잘 어울린 사랑을 우리 또한 우리가 만나는 대상에게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늘 본문에서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냐고 묻는 질문에 예수님이 답하신다. 7*70번 490번. 7은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수. 그 의미는 계속 무한대라고 봐도 좋다. 여러분은 인생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몇 번 용서 받고 사실까? 몇 번 용서 받기를 원하시나? 그렇다면 그 정도의 10분의 1만 실천해도 여러분의 삶은 더욱 빛이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서게 되지 않을까 한다.
단 노파심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만 용서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기에 사랑은 정의와 배려의 어울어짐이라는 사실도 잊지 마시길 바란다.그래서 정의와 배려의 삶을 늘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길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