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27 아침기도회
친절하고 슬기로운 신앙생활(고후9:12-15)
-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영향을 받은 목사님 중에 조병호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다. 이분은 한시미션이라는 단체를 세우고 무교회지역 선교에 관심을 기울이셨던 분이다. 그런 일은 그분이 신학대학원 다닐 때부터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분은 서울에서 학교 다니면서도 주말이면 버스를 타고 주로 경남 지리산 지역 교회 없는 곳을 방문하여 지역을 섬기고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셨다.
- 한번은 눈에 들어오는 독거 어르신이 있어 고기 한근을 사가지고 그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난한 신학생 형편에 소고기 한근을 사서 신문지에 말아서 가는 그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고 한다.‘얼마나 고마워할까? 이 비싼 소고기를 내가 드리면’ 이런 생각을 했으리라. 어르신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계시기에 당연히 고마워하리라는 자신감에 그 고기를 옆에 놓으며 뒤를 돌아 걸어 나왔다고 한다.
- 그런데 몇 걸음을 걸었을까? 마당 한 가운데로 둔탁하게 고기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 어르신이 말했다고 한다: “가져 가이소!” 가난한 신학생이 큰 돈을 들여 사랑의 이유로 드린 고기 한점은 그렇게 마당에 내팽개쳐졌다.
- 그 경험은 훗날 한시 미션이라는 섬김과 봉사의 사역을 하는데 큰 지침이 되었던 것 같다. 시골 무교회 지역 봉사를 갈 때 조병호 목사님은 이 경험을 나누면서 진정한 봉사와 섬김은 “받는 사람이 편하게, 받는 사람이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주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받는 이의 사정과 마음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봉사는 교만과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셨다.
- 인터넷에서 “남을 돕는다는 건 무엇일까?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다녔던 기억을 떠 올리며” 라는 글을 접할 수 있었다. 정인진이라는 분이 2010년에 쓴 글이기에 지금과는 상황이 다를 것이다. 그분은 보육원 봉사를 다니다가 속된 말로 때려 치웠다고 한다.
- 보육원이 돈을 들여 새로 건물을 지었는데 정작 공부방은 여전히 작고 초라하였고 정작 아이를 위한 공간은 없었다는 거다. 그런데 그건 그 일을 관둔 공식적인 이유였고 진짜 이유는 보육원 아이들의 태도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보육원 관계자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한다.
- 그 진짜 이유가 뭐냐면 어디에서도 경험 못한 아이들의 태도에 불쾌감을 느꼈기 때문이란다. 좀 친해져서 잘해주면 어느새 인가 건방지고 버릇없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 “‘그들은 왜 자신들이 받는 애정과 사랑에 그렇게 밖에 반응할 수 없었던 걸까?’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한참동안 의문과 불쾌감으로 마음이 상했다.” 라고 그 글에서 표현하고 있었다. 자신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의 이 멋지고 헌신적인 봉사를 이해 못하는 대상에게 다시는 그런 류의 봉사를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 얼마나 되었을까? 그가 피에르 신부라는 분이 쓰신 <당신의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라는 책의 한대목을 접하고는 봉사의 올바른 자세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 대목은 바로 “불행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희들 알겠지.”
- 사랑을 충분히 받아보지 못한 아이들이 그 받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몰라서 나온 서툰 행동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남을 돕는다는 것은 자신을 가장 낮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 사회학의 “아비투스”(habitus)라는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문화적 혜택에서 소외된 그룹의 말과 행동은 상대적으로 거칠어 보인다. 그들의 수단이 거친 것이지 그 마음과 내용까지 거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문화 자본을 사용하는 그룹들은 상호 이해를 높이기 위해 때로 형식을 더 갖출 필요도 있고 그 형식 너머의 내용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어야 할 것이다.
- 오늘 성경 본문은 헌금과 같이 물질적으로 남을 도울 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간략히 말하자면,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즐겁게 주어서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혜이다. 앞선 이야기로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는 남을 도울 때 적선하듯 주면 안 된다는 말이 되겠다. “내가 고기 한근 사온 게 어딘데.” 그 마음이면 가난한 어르신의 자존심 같은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우리가 알 듯이 신이셨는데 인간을 구원하고자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 인간의 삶을 온전하게 33년간 사셨던 분이다. 그분은 내가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있지만, 너희와 다른 신이라고 인간을 교만한 맘으로 내려다보지 않으셨다.
- 인간의 방법으로 인간의 언어로 무릎 꿇고 섬김으로 사람을 살리고 섬기셨다. 말로만 하지 않고 때로는 아파하는 이의 얼굴을 어루만지시고, 같이 통탄해하시면서 그들을 살리셨다. 그리고 가능한 한 인간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와 표현으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 주셨다.
참고로 예수님의 어록을 기록한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아시듯이 그리스는 철학이 발달한 지역이기에 그리스어는 수준 높은 표현이 가능한 언어다. 그럼에도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어는 코이네 그리스어라고 해서 그 당시 시장에서 쓰는 쉬운 말로 쓰였다. 고상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은 사람들이 쉽고 정확하게 알리고자 함이었다.
- 예수님의 겸손한 섬김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았다. 일례로 그 분은 인간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좌우로 강도라고 칭한 정치범 2명이 같이 십자가 형에 처해졌다.
- 그 중 한명이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예수님께 요청했다. 거기에 예수님은 그냥 대답없이 그를 천국에 데려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강도에게 끝까지 친절했다. 그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대답해줬다.
- 한 설교가는 이 대목을 보고 이것이 쉬운 대답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유인즉슨, 십자가 형은 두 팔이 온 몸을 지탱할 힘이 없어지면서 호흡곤란이 오는 형벌이다. 다리에 힘을 줄 수 없는 상태에서 가슴을 일으켜야만 호흡할 수 있는 형국이었다. 그렇기에 저 대답은 그저 예수가 편안히 있으면서 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 한 단어 한 단어 한구절 한구절 온 몸을 들어서 호흡을 내뱉으면서 한 대답이라는 말이다. 그는 그렇게 돌아가시면서까지도 한 강도를 위해서 친절했으며 그 대답은 결국 성경에 기록되어 이후 세대 온 인류를 향한 귀한 답이 되었다고 하겠다.
- 오늘 설교 제목은 “친절하고 슬기로운 신앙생활”이지만 이는 결국 “친절하고 슬기로운 학교직장생활”로도 치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우리가 만나는 대상들은 생각보다 무뚝뚝하고 때로 무례하고 때로 “4가지”가 없어 보이게 느낄 때가 있다. 열심히 강의를 하려고 들어갔는데 누구도 강의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듯한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 힘들고 어렵지만 가르치다가 봉사하다가 설명하다가 오히려 마음이 상하는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럴 때 예수님을 떠올리고 예수님의 도움을 간구함이 옳다. 비교할 수 없는 더 열악한 상황에서도 이 무례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끝까지 사랑하고 친절하셨듯,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몸에 익혀 지금처럼 가르치고 일하고 봉사하는 일에 여전히 최선을 다하길 축복한다. amen
<기도>
하나님 우리를 향해 끝까지 사랑하시고 섬기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우리도 우리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게 해 주세요.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내면의 치열한 전쟁을 치르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일 수 있음을 알게 해 주세요. 주님이 마지막 순간까지 마지막 한사람에게까지 친절과 섬김을 베푸신 것을 기억하며 우리도 더욱 낮아지며 섬기는 삶을 살게 해 주세요. 그래서 받는 이와 주는 이가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이 가득하게 해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