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29-아침기도회-여유가 만드는 선행 (눅10:30-37)
- 소셜 미디어에서 영화평론가 이동진씨가 소개하는 실험 같은 이야기를 듣고 일리가 있는 듯하여 소개해보고자 한다. 한 대학의 A라는 건물에 사람을 모이게 하고 한 사람씩 출발시켜서 B라는 건물로 가서 무언가를 발표하게 한다. 그런데 A라는 건물에서 B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 있는데 거기에 한 사람이 발작을 일으켜 쓰러지게 하고 반응을 살피는 실험을 한다. 아무도 없고 혼자 있는데 그런 사람을 보면 어떤 행동을 하는가 지켜본다. 어떤 사람은 도와주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그냥 지나가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못본 채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 그럼 어떤 사람이 도와주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행동을 했을까? 유의미한 인과관계는 의외로 하나였다고 한다. 여유의 유무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발표가 2시인데 20분 전에 출발한 사람과 1분전에 출발한 사람이 달랐다는 거다. 여유가 있으면 도와줄 수 있었지만, 여유가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성격과 인격과 상관없이 그냥 지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 우리가 기독교 대학의 직장생활을 하지만, “기독교인이 왜 저래” 그런 말을 듣기도 하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실망도 하고 그걸 확대해서 그 사람을 비판하거나 또 더 확대해서 기독교를 싫어하고 교회를 멀리하기도 한다.
- 그런데 직장 생활은 교회 생활과 다르다. 밤새 밀린 업무를 하고 처리해야 할 일이 쌓이면 여유가 없어진다. 여러분이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그 분이 얼마나 바쁘고 스트레스가 많은 지 잠시 생각해 보시라.
- 그러면 그분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직장 생활에서 볼 때의 모습과 교회에서 볼 때의 모습이 같으면 좋겠지만 다르다고 그 모습을 보고 “신은 죽었다”고 고백하는 니체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 오늘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유명한 말씀이다. 앞서 소개한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데 강도 만난 사람이 거진 죽은 채 쓰러져 있다. 각각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이 지나간다.
그런데 요즘 말로 하면 목사님, 그리고 신학자 그냥 지나가고 이방인이라고 놀림 받은 외국인 노동자만이 그 사람을 돌보아 준다. 그럼 목사님, 신학자는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그렇게 지나간 걸까? 여기서 앞의 이야기와 차이가 있다. 성경에서 그 걸음의 방향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라고 하는데 예루살렘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로서 요즘 말로 예배당이 있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이 상황은 목사님이 예배에 늦어서 예배 드리러 가다가 그 사람을 만난 게 아니라 예배 다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만난 것이다.
- 여유가 오히려 있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그래도 변호하자면 옛날 예배 제사는 소를 잡는 등 매우 힘이 드는 것이라 피곤했다고는 할 수 있다. 심적인 여유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저 여유가 없고 피곤해서 남을 돕지 못한다고 하면 다 될까?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합리화하면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 2012년 Psychological Science 23(10)에 실린 Mogliner의 논문에 의하면 타인에게 봉사 등으로 시간을 쓰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는 사람보다 좀 더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이스트코스트 대학생 218명을 나눠서 한 그룹은 5분 간 중병 앓고 있는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게 하고 한 그룹은 스펠링 찾기 같은 일을 시켰다고 한다.
- 그리고 나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하는 질문을 했는데 편지를 써 준 그룹이 훨씬 더 많이 자신에게는 더 시간이 많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유는 자기 효능감이라고 한다. 남을 도울수록 자신은 쓸모 있는 사람이고 시간적 여유도 생기더라는 거다.
- 또 예일대 의대 연구팀의 2015년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18-44세 남녀 77명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각자의 스트레스치를 14일간 조사했다. 그런데 선행을 할수록 자신의 감정상태는 물론이거니와 정신 건강도 좋아졌다고 한다.
그럼 여러분은 생각하길 그 정도가 되려면 선행이 거창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직장 등에서 할 수 있는 사소한 선행이 차이를 빚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선행의 예는 문 잡아주기, 도움이 필요한 지 묻기와 같은 정말 소소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런 소소한 것은 우리 학교 직장에서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나? 길 헤매고 있는 학생에게 길 안내해 주기, 쭛볏거리는 학생 물어봐주기 등등
- 그런데 그런 사소한 봉사가 스트레스를 줄이고 그런 선행이 자기 효능감을 높여 시간에 여유를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유는 결국 또 다른 선행을 베풀게 할 것이다. 여러분, 바쁘고 분주한 그리고 때로는 반복되는 학교생활에서 작은 선행을 시작해 보시라! 그러면 그것이 물리적 여유를 만들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마음 속 여유는 만들어 낸다. 그런데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여러분을 살리고 이웃도 살리게 되는 신비가 된다는 말이다.
- 그리고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한 율법사가 예수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어떻게 얻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 나온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우리의 선행은 결국 훨씬 영적인 복의 통로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오늘도 내 삶은 바쁠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작은 선행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그것이 내 맘의 여유를 만들게 하고 그것이 나를 살리고 그것이 우리 계명공동체를 더 풍성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제가 카리타스 봉사센터장이라고 하던데 봉사센터도 많이 활용해 주시길 바란다. 아멘
<기도>
하나님 우리는 이런 저런 일로 바쁩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그러나 오히려 작은 선행이 마음의 여유를 넓혀간다고 하셨으니 그저 하루에 한가지씩 사소한 선행이라고 실천하게 하소서. 내가 잡아주는 문 한번이 결국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행복의 출발이라는 것을 알아 작은 선행으로 오늘도 여유와 감사가 넘치는 시간을 만들어 가게 해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