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숨바꼭질 다 해 보셨을 거고, 지금도 자녀와 함께 하시는 분이 계실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권일한 선생님의 책 <선생님의 숨바꼭질> 이라는 책의 한 대목이다: “혼자 하는 숨바꼭질은 비극이다. 숨바꼭질은 찾아내는 기쁨, 누군가 가까이 다가올 때의 긴장감, 발견되는 순간의 아쉬움이 있기에 재미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숨바꼭질은 잔인하다.”
그러니까 정작 숨기는 하지만 술래가 찾아주지 않고 계속 숨어만 있어야 한다면 그것처럼 슬프고도 우울한 놀이는 없을 것이다. 숨지만 술래를 만나는 것이 더 기쁨인 놀이가 숨바꼭질이라는 것이다.
저도 숨바꼭질은 아니었지만 그런 비슷한 일로 기억나는 게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가 아닐까 추정하는데 장롱 속에 들어갔다가 문을 못 열어서 혼이 났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이 외출한 동안 역시 초등학생이었던 형과 제가 장롱속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는 놀이를 했던 것 같다.제가 장롱속에 들어가면 형이 문을 잠갔다가 풀어주는 놀이였던 것 같다. 그런데 형이 열쇠로 못 여는 거다.
놀이가 이젠 공포가 되었다. 결국 형이 옆집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아주머니가 와서 문을 열어 주어서 살아났던 기억이 난다. 숨바꼭질도 숨어만 있으면 그래서 누구도 안 찾아주면 그건 더 이상 놀이가 아니고 슬픔이고 좌절일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다. 죄의 특징은 부끄러움이고 그 부끄러움을 감추고자 숨게 되는데 그 모습이 바로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볼 수 있다.잔인하고도 씁쓸한 하나님과 인간의 숨바꼭질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죄 지은 아담과 하와를 부른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어디 있는 지 몰라서 한 질문이 아니다.여기에는 숨어있는 상태에 머물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다.
부끄럽고, 숨고 싶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아담과 하와의 상태를 아시고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가고자 또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질문이다.숨어 있는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기 위한 호칭이다.
인간의 실존은 숨어 있는 데서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을 만나서 에덴동산에서 같이 노는 데 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우리는 연약해서 이런 저런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물리적이 아니더라도 심리적으로 숨고 위축되게 된다. 어린아이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고, 하다못해 키우던 강아지도 잘못했을 경우 구석으로 가곤 한다.그러면 여러분이 보호자로서 어린 아이이든 강아지이든 어떻게 하는가? 그들을 혼내더라도 부르고 어루만져 주는 존재가 보호자의 역할 아니겠는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핵심적인 죄의 모습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단절인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묻는 질문은 여러분을 회복시키기 위한 첫번째 질문인 것이다.
하나님이 “네가 어디 있느냐?” 묻는 또 하나의 의미를 찾는다면 “내 앞으로 나와도 괜찮다. 내 앞으로 나와야 회복된다”이다.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부름에 용기를 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강아지가 주인을 잃어버리면 강아지가 할 수 있는 기억력을 동원해서 집으로 돌아오든지 주인을 찾으려 하든지 한다는 것이다.
집 근처라면 강아지는 냄새를 맡든 지 해서 스스로 집으로 찾아온다고 한다. 그런데 집 근처가 아니든지 해서 집 찾기에 실패하면 강아지는 주인과 헤어진 마지막 장소를 기억하고 거기로 돌아간다고 한다.
일전에 제가 키우던 강아지도 그런 경험이 있다. 고양이보고 달려가는 통에 그리고 평소보다 길게 멀리 쫓아가는 통에 강아지를 잃어버렸다. 달려간 곳을 가 봤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조금 걱정이 들려고 했는데 그 녀석이 바로 우리가 헤어진 그 곳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더라.
호세아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그런 점에서 우리도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는 분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우리가 무너졌을 때 다시 하나님을 만났던 곳, 그곳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은 나를 다시 기쁨으로 받아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시는 변함없는 방식이다.
모든 비행기도 항로가 있기에 신호를 내어 가는 길을 관제탑과 교신해야 하는 것처럼 내 인생의 항로도 하나님께 알리고 스스로 점검하는 것이 옳다.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하나님 제가 어디 있습니다.” “제 상태가 어떻습니다” 이렇게 신호를 보내라.
그러면 우리의 상태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새벽 빛처럼 늦은 비처럼 우리 인생을 인도해 주실 것이다. 인생이라는 항해를 하나님과 동행하며 멋지게 해 나가시길 기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