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7일 아침 기도회-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합니다
마태복음 6장 26-34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 오늘 부른 찬양곡은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제목부터 무서운 책을 쓰신 안이숙 사모가 원곡을 개사하고 편곡하여 만든 곡이다. 그런데 이 곡이 기독교 노래 치고는 가사가 비관적이고 염세적이다. 정말 내일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한푸리 같이 들린다. 보통 기독교 음악 같으면 소망, 희망, 기대 이런 주제가 담길 것 같은데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장래일도 몰라요”하고 노래 부른다. 그리고 원곡의 박자는 4/4박자인데 한국 노래로 바꾸면서 3/4박자로 바꿨다. 이 이유에 대해 한 칼럼에서는 한국인의 DNA가 3/4박자의 아리랑인데 아리랑이 바로 현실에 대한 한스러움을 노래하는 곡으로 3/4박이 한국 정서에 더 잘 맞는다고 말한다.
- 그럼 원곡은 어떨까? 원래 이 곡은 1950년에 Ira Stanphill(아이라 스탠필)이라는 미국의 복음송 작사작곡가가 쓴 곡이다. 곡을 만들기 2년전 사랑하던 아내와 헤어지고 작곡할 의미를 잃어버린 상황이었는데 갑작스런 영감으로 만든 곡이라고 한다. 원곡 제목은 I Know Who Holds Tomorrow다. (나는 누가 내일을 붙잡고 있는 지 알아요)
- “나는 내일을 모르지만 염려하지 않는다. 내일 일어날 수많은 일들을 내가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누가 내일을 주관하는지 누가 나의 손을 붙잡고 있는지 알아요” 와같은 가사다.
- 그러니까 한국 가사는 “몰라요”가 핵심 단어라면 미국 원곡의 가사는 “알아요”가 핵심단어라고 하겠다. 한국 곡에 비해 원곡에서는 힘든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내일 하나님이 변함없이 인도해 주실 것을 믿어요’ 이런 긍정적인 느낌이 더 강하다고 하겠다. 그럼 한국 곡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다. 한국인의 정서가 바꾸게 만든 가사라고 본다.
- 안이숙 작사가의 삶을 보면 더 잘 이해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갔고 사형선고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생이고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한국이 해방이 되면서 그는 감옥에서 풀려났다. 참고로 그의 사형 집행일은 8월 18일이었다. 그러니까 3일만 더 늦게 해방되었더라면 그는 사형집행이 되었을 사람이었다.
- 그런 그의 경험 속에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란 고백은 전형적인 한국 전통의 반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떠나지 않기를 그 누구보다 강하게 바랬던 아리랑의 반어적 고백처럼 내일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강하게 소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이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었다”는 성경의 고백처럼 그는 사형집행날을 놓고서도 내일을 기다렸다고 할 수 있겠다.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명저가 있다. 우리 총장님이 영상 채플에서 소개해 주셔서 학생들에게도 유명해 진 책이다. 프랭클 역시 2차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서 감옥생활을 하신 분이다. 삶의 의미를 발견할 때 살아갈 힘을 갖게 된다고 보는데 그는 그런 그의 마음을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표현했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명저를 쓴 박영선 목사님이라는 분의 설교 중에 들은 말이다: 그분은 은퇴하신 분이니까 연식이 꽤 되신 분인데 그분이 젊을 때 그분의 친구가 겪은 일화를 소개해주었다. 밤에 서울 중심지라고 할 광화문거리를 걷다가 그분 표현 대로 하자면 “깡패”를 만났다고 한다. 깡패가 그 친구보고 “왜 잘난 척하고 밤거리를 싸돌아 다니냐?” 그러면서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그 말에 그 친구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빨리 때려. 과외 늦어” 그러면서 목사님이 이렇게 덧붙였다: “내일이 있는 사람이 오늘을 산다”
- 오늘 본문 34절에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라고 말한다.뭐 좀 더 심오하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제 수준에서 해석하자면 이런 말이 된다: “오늘 괴롭다고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늘 망했다고 내일도 망한다고 생각하지 말자.”
- 기독교에서 악한 세력으로 보는 사탄이라는 존재는 내일을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오늘을 끝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내일도 없기에 오늘도 포기하면서 살라고 한다. 안이숙 사모님의 경우로 말하자면 8월 18일일 사형일인데 내일은 무슨 내일을 기대하면서 내일을 붙잡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가? 이런 것이 사탄의 나쁜 생각이다.
- 그러나 내일에 대한 생각이 있을 때 삶은 의미가 생기는 법이다. 뭐 이렇게 말하면 나도 내일이 없는데 내 꿈이 사라진지 오랜데 이러면서 더 침울하게 생각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자식보고 살았는데 자식도 뭐 싹이 노랗고, 뭐 남편은 정말 남의 편인 것 같고, 아내는 안의 해라고 하는데 그 해가 태양이 아니라 해로움의 해인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서 내일이 없다고 말할 분이 있을 지 모르겠다.
- 그런데 프랭클 박사에 의하면 사람은 3가지 방법으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 하나는 행동 즉 어떤 일을 함으로써
- 두번째는 가치 즉 어떤 경험이나 어떤 사람을 만나고 사랑함으로써
- 세번째는 피할 수 없는 고통에 어떤 태도를 취함으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 뭐 마지막 부분이 핵심이라고 하겠지만 저는 두번째 부분 즉 누구를 만나고 또 그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 삶의 의미를 주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군대에서 유격 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데 10m 인가 인간이 가장 무서워할 만한 높이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듯한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럴 때 교관이 묻는다. “애인 있습니까?” “네” 그러면 애인 이름 부르고 떨어지라고 하고 “없다”고 하면 “어머니”라도 부르라고 하고 떨어진다. 사랑은 공포와 고통을 이기며 삶의 의미를 준다고 하겠다.
- 가정의 달이다. 나에게 내일은 뭘까? 앞에서 자식, 아내, 남편 시원치 않다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그들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싱글이라면 내 반려견 내 부모님이 나의 힘이 아닐까? 그들이 있어서 내가 오늘을 사는 것이다. 나의 삶의 의미를 제공하는 내일이다. 가정의 달을 맞아 내 가족을 향하여 한번 더 감사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나누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가는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 물론 목사로서 특별한 만남의 경험은 신과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신과의 만남은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깊은 삶의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그렇기에 혹시 아무리 생각해도 가족에 대한 사랑과 만남이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교회 다닐 때가 된 거”라 생각하고 5월부터 교회 나가는 것도 삶의 의미를 찾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아무쪼록 가정의 달을 맞아 사랑하는 대상을 생각하고, 고통 속에서도 올바른 태도를 가짐으로써 내일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길 축복한다.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