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2001년 911 테러 사건으로 약 1500명 가까운 사람이 목숨을 잃은 가운데 많은 사람이 구조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마지막 생존자에 속한 사람으로 Genelle Guzman(지넬 거즈만)이라는 여성도 있었다. 그녀는 64층에서 근무하다가 폭발음을 듣고 비상 계단을 통해 걸어 내려오다 13층에 이르렀을 때 건물이 무너지면서 건물 더미에 27시간 파묻혀 있다가 생존했다.
콘크리트 더미 속 몸이 묻히고 어깨 위로 손 일부만이 콘크리트 바깥으로 나와 있던 상태였다.그런데 그렇게 묻혀 시간을 지내던 중 그녀의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폴이라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밝혔는데 그 폴은 그녀의 손을 잡고 힘을 주고 격려를 해 주었다고 한다.무려 4시간이나 함께 있다가 구조대가 오는 소리를 듣고 폴은 손을 풀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그녀는 그렇게 폴과 대화를 나누며 생존의 사투를 벌이면서 살아나면 3가지를 실천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소홀했던 신앙을 뉘우치고 자신이 다녔던 교회로 추정되는데 뉴욕 Brooklyn Tabernacle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제대로 신앙생활 해야겠다. 두번째는 사랑하는 약혼자와의 결혼을 받아들이고 결혼해야겠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이 폴을 찾아 특별히 감사를 해야하겠다.
지넬은 앞의 두가지는 실천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지막 세번째, 폴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구조하러 온 소방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구조 당시 지넬 외에 누구도 없었다고 한다. 폴은 누굴까? 그는 그의 교회 목사님 등과의 대화를 통해 깨달었다고 한다. 폴은 천사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Angel in the Rubble(돌무더기 잔해 속의 천사)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죽겠다”는 말을 참 대화 중에 많이 쓴다. 우스개 소리지만 사형수가 집행장에 끌려다가 발을 헛디디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라고 고백했다는 것 아닌가. 죽으러 가면서도 “죽을 뻔했다”고 말한다. 더워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화나서 죽겠다. 그나마 이 말은 원인과 결과가 이어진다. 더워 죽을 수 있고, 배고파도 죽을 수 있겠다. 이해는 되는 말이다.
그런데 “예뻐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 “귀여워 죽겠다” “보고싶어 죽겠다.” 이런 말은 곰곰이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조화이다. 심장 질환 등 몸에 이상이 없는 한 일어나기 힘든 조화다.
여하튼 우리는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산다. 좋게 해석하면 죽음을 늘 생각하며 사는 철학적인 민족이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우리 스스로 볼 때 그런 깊이로 죽겠다는 말을 자주 쓰는 것 같지는 않다.오히려 그 말은25 전쟁 등의 근대사의 아픔을 통해 수많은 죽음을 집단적으로 목격해서인지 죽기 싫다는 심리의 반어적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죽을 뻔 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죽을 때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강조한다. “한 알의밀이 땅에 떨어져죽지 아니하면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의 죄된 자아의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강도 2명과 같이 십자가에 달렸다. 그런데 강도라고 하지만 그들은 정치범이라고 알려질 정도로 생각이 많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한 명은 여전히 자신의 죄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예수마저 비난하고 조롱했다. 그 대신 옆에 있던 또 한 명은 예수께 용서를 빌었다: 주님 나라 들어갈 때 나를 기억해달라 그러자 예수님은 그 강도에게 약속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저는 여전히 때때로 십자가에 같이 매어 달린 채 예수님의 능력만 기대하고 비난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여전히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감사와 믿음을 표시하기 보다는 비난과 원망이 내 마음 속에 일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아직 살만해서 그렇고 죽을 뻔할 때만 예수님을 찾다가 다시 살만하면 잊어서 그런 것 아니겠나 생각한다.
오늘 본문은 제가 실존적으로 좋아하는 말씀이다. 저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이유를 설명하는 이유가 되는 말씀이다. 그런데 참 잊고 산다는 생각을 동시에 한다.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위해 돌아가신 이유는 옛 자아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고자 함인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살기로 했다면 그것은 이제는 옛 자아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고자 함인 것이다.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혹 한 강도처럼 내 죄로 십자가에 달렸으면서도 예수님을 비난하였던 적은 없는지 죽을 뻔할 때만 주님을 찾지는 않았는 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리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맛보는 시간이 임하길 기원한다. 지넬(Genelle) 처럼 나를 살리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세례도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