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5:6-10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제가 전도사 시절에 주보에 달린 성경 퀴즈를 채점해서 돌려주는 일을 맡은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주보에 나오는 문제를 푸는 성도들은 정해져 있다. 했던 분만 주로 하고 그런 분들이 꾸준히 한다. 그런데 그런 분 중에 독특한 이름을 가진 분이 계셨다: “죽”자 “자”자. 그러니까 이름이 “죽자”였다. 그런데 성은 뭐 였냐면 나씨였다. 그러니까 성까지 같이 부르면 그분의 이름은 “나죽자”였던 거다. 죄송하다. 남의 이름가지고 그러면 안되는데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한다. 그런데 참 성경적인 이름 아닌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 나죽자.
이름은 그저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또 기왕이면 잘 지으면 좋고, 또 뜻도 좋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기독교역사를 통해서 참으로 저주받은 이름이 있다면 저는 바로 사도신경에 나오는 본디오 빌라도라고 본다. 전세계 모든 교회에서 매주일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통해 신앙고백을 하는데 매주 이 사람의 이름이 되 뇌이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놓은 사람으로 불명예자로 되 뇌이게 된다. 이 분을 보면서 늘 정치인 함부로 되어서도 안 되고 인기에 영합한 부정적인 결정을 내리면 안 되다는 교훈을 되새긴다.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이름은 야곱이자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고 말씀하는 대목을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고 말하는 대목은 오늘 35장 이전에 32장에도 먼저 나온다. 즉,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면서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가지 못한다고 매달린 야곱에게 천사가 항복하면서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같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인데 32장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과 35장의 이스라엘 이름의 뜻이 다르다. 32장에서는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하면서 실존적으로 불안한 야곱이 말 그대로 축복해줘 그 집요함 끝에 얻은 이름이고 35장의 이름은 벧엘로 가나안주민의 위협을 물리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벧엘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이 불러 주신 이름이다.
이름의 뜻이 어떻게 다르냐? “이스라”는 이기다라는 뜻이고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인데, 32절 혈기방자하여 천사와 싸워서 이겼을 때 천사라 불러준 때는 엘이 목적어로 쓰였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이겼다”라는 뜻이다. 좋은 이름이라고 하기보다는 부정적인 이름이라고 하겠다. 그에 비해 벧엘로 돌아와서 하나님이 불러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서 “엘”이 주어로 쓰였다. 그러니까 그때의 뜻은 “하나님이 이겼다,” “하나님이 이긴다”라는 뜻이다.
이 오후에 너무 이름가지고 말장난 하는 것 같아 죄송한데 저는 야곱의 이스라엘의 이름 뜻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 우리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러가지 문제가 생겼을 때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누구나 그렇게 시작하고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져주신다. 들어주시고 양보해 주신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야곱처럼 에서가 자기를 죽이러 오는 실존적인 어려움과 곤란 속에서 하나님을 찾은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힘들고 어두울 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 과정에서 져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신앙이 무르익을수록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더 알고자 하게 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점심시간을 쪼개면서까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이기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이기게 하려는 것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이기는 삶. 그 삶이 진정으로 성숙한 기독교인의 삶이 아니겠는가?
이름으로 시작했으니 이름과 관련된 유명한 말 하나 인용하는 것으로 정리해 보겠다. 효경 1장에 보면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부모님께 받은 신체를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입신양명”하는 것이 효의 마침이란 뜻이라고 하겠다.
저는 이 말을 비틀어 적용해 본다. 본디오 빌라도처럼 자신의 목숨, 자신의 신체를 아끼려고 하면 이름이 널리 후세에 알려지되 불명예자로 알려진다. 그러나 권사님으로 추정하는 나죽자의 이름처럼, 그리고 성경의 많은 위인, 순교자들처럼, 내가 주님 안에서 죽으면 결국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세상에 널리 드러내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처하고 만나는 공간 속에서 나를 죽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실천하여 결국은 하나님이 그런 나를 높이는 경험을 하길 축원한다. 하나님이 나를 이기면 나도 결국 승리한다는 이 사실 기억하여 오늘도 말씀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 시길 축원한다.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