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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여름 서울여대 대학교회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던 때 있었던 일이다. 2층 교회 사무실로 한 노숙자가 찾아왔다. 교회 간사님을 통해 들어보니 그분이 하모니카인가를 불어서 번 돈 15만원을 헌금으로 내겠다고 왔다는 거다. 그러면서 그 분이 목사님을 꼭 만나고 싶어했다고 한다.
- 그런데 그 분이 저에게 독특한 제안을 했다. 스토리가 긴데 축약해서 말하자면 처음에는 3일간 30만원을 빌려주어서 목사로서 기독교의 사랑을 실천해 보일 수 있느냐?” 그렇다면 자신이 3일 후인 돌아오는 일요일에 그 돈을 갖고 교회로 와서 대학교회에 등록을 하고 돈도 갚겠다는 것이다.
- 이를 통해 나는 신뢰를 얻고 사람도 얻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이라는 등의 말을 했다. 목사로서 그 정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냐고 했다. 제가 흔들리는 것 같으니까 수정 제안까지 했다: 아예 자기가 리어카를 사서 이 생활 청산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가? 리어카 값이 60만원이란다.
- 이쯤 되니까 의심이 가서 교회 간사님에게 전화를 했다. “헌금이 정말 15만이 맞긴 맞냐” 고? 그랬더니 13만 5000원 정도라고 한다. 뭐 15만원은 아니었지만, 한푼 두 푼 봉투에 담다 보면 그런 착오는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가 제안했다. 제가 그 헌금 가져가는 걸로 하고 45만원을 드려서 60을 만들어 드리기로 했다.
그날 마침 저는 우리집 강아지가 설사가 심해 병원에 데려가려던 참이었다. 일전에 파보 바이러스에 걸렸서 100만원이 들었다. 그런 개가 또 아프다고 하니, 이번에도 100은 아니더라도 꽤 많이 들 걸 각오하고 있던 때였는데 그 노숙자를 그날 만난 거다.
순간 그 사람을 믿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개보다는 사람이 먼저 아니겠는가?’ 생각했기에 45만원을 그렇게 그 분에게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우리 집 개는 2만원에 치료가 되었다.
- 그렇다면 그 분은 어떻게 되었을까? 주일에 그 분이 왔을까? 그러나 그 분은 그 주일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도 오지 않았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교회에 출석했다는 소식은 없다.
- 이런 걸 전문용어로 뭐라 그러는 지 아시죠? “사기” 이런 나를 뭐라 부르냐면 “호구.” 저는 무려 45만원 뜯긴 거지요. 저는 바보짓을 한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당하고도 한동안 혹시 그 사람이 오지 않을까 기다렸다.
- 그런데 혹시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 이런 마음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많은 요구를 했을까?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베풀기만 하고 있을까? 이번 한 번만 도와주면 하나님 잘 믿을 게요. 그런데 막상 그 일이 해결되면 “쌩.” 하나님은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사기를 당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 그런데 신이신 하나님은 알고도 속아 주신다. 또 속아 주시고 또 속아 주신다. 하나님은 여태껏 나를 몇 번 용서하셨을까? 하나님은 지금도 아마 하루에 일곱번이라도 나를 용서하시고 계실 것이라고 본다.
오늘 읽은 성경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그럼 우리도 이 말씀처럼 실천하면서 살까? 제가 그 노숙자가 또 와서 잘못했다고 그러면서 10만원을 빌려달라고 하면 또 빌려줄까? 아니다. 돈 갚으라고 하지 않을까?
- 스티븐 체리라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 교수신부이자 심리학자는 그의 책 [용서라는 고통]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너희도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구절들이 전달하려는 진짜 메시지는 이것이다. “신께 용서를 구하는 과정의 핵심적 일부로서 너희도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 우리는 하나님께 늘 용서받으면서 산다. 그걸 동의하시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과정의 일부에서라도 즉, 그것이 고맙게 느낀다면 우리도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 물론 용서의 깊은 의미를 간과할 수는 없다. 하버드 의대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용서와 구분되어야 할 것 몇 가지를 말했는데 2가지만 소개하면 이렇다: 1. 용서가 범죄에 대한 관용을 의미하지 않는다. 2. 용서는 가해자를 너그러이 봐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용서는 가해자의 행동과 우리의 아픔이 미래에 개선될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
-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수 없는 용서를 받아왔다. 누가 신 앞에 옳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 은혜가 크다는 걸 안다면 비록 하나님처럼 실천은 못하지만 용서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더욱 키워 나가는 것이 올바른 삶의 방향이 아닐까 한다.
- 특별히 이스라엘과 하마스 세력 간의 전쟁이 팔레스타인지역에서 발생했다. 복잡한 상황이겠지만 평화와 화해 용서로 빠른 시일 내에 전쟁이 마무리되길 기도한다.
- 하루에 7번은 택도 없지만, 평생에 7번은 징 하게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적어도 평생에 7번 정도는 “징하게” 용서하는 삶을 살길 축원한다.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