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살리는 협력
마가복음 2장 2~5절: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 하버드대 생물학과 겸 수학과 교수인 마틴 노왁과 과학분야 저널리스트인 로저 하이필드가 쓴 책으로 [초협력자]라는 책이 있다. “저자들은 생명과 사회의 진화에는 기존의 변이선택·경쟁 같은 요소만이 아니라 ‘협력’이라는 결정적인 제3의 요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심지어 그것은 아메바 수준에서도 관찰되는데, 개별 아메바는 평소엔 개별적으로 먹이를 섭취하다가 사정이 나빠지면 다세포 유기체를 형성하기 위해 뭉친다고 한다.”
경쟁의 시대 옆 사람과 경쟁하고 앞사람을 눌러야만 소위 진보를 이룰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협력할 줄 아는 사람이 오히려 진화하고 그 협력이 생명을 늘린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도 협력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풍병자 친구를 살리고자 지붕을 뜯어서 예수님께 데리고 간 4명의 친구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라는 능력자가 동네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예수라는 분을 만나면 어떤 병도 나을 수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들은 중풍병을 앓고 있던 친구를 살리고자 그를 침상 채 데리고 갔다. 하지만 그들처럼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이 가득해서 도통 예수님 근처에 갈 수가 없었다.
- 이쯤 되면 “그냥 가자”할 것 같은데, 이 친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님께 가까이 갈 방법을 찾았다. 어떤 방법이냐? 바로 지붕을 뜯고 들 것 네 귀퉁이에 줄을 달아서 예수님 앞으로 그 동무를 내렸다.
- 그걸 본 예수님의 평가가 놀랍다. 보통 우리가 상상하듯이 종교적 치유는 당사자의 열심이나 간곡한 기원으로 이뤄진다. 그러니까 아픈 사람이 고쳐달라고 외치면 그 외침을 통해 고백을 통해 고쳐지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적 치유의 순서이다.
- 그런데 이 사건은 매우 예외적이다. 성경에서 뭐라고 하냐면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환자를 고쳐 주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말 그 친구의 열심 덕분에 중풍병자는 아무 말도 않고 고침을 받았다는 거다.
- 기독교에서는 중보라는 어려운 말을 쓴다. “사이에 들다” “중재하다” 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는데 쉽게 중보기도라 하면 남을 위해 대신 기도해 주고 간구해 주는 기도를 말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것이 효력이 있다.
- 그런 점에서 우리 주변을 둘러보길 바란다. 4명의 헌신이 한 사람을 살리듯 우리의 중보와 우리의 관심이 곤란에 처한 학생, 동료, 공간, 부서를 살릴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깨달은 우리가 이렇게 사람 살리는 중보자가 되길 바란다.
- 또한 동시에 나를 도울 4명의 동무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혼자 아파하지 않길 바란다. 성경의 중풍병자처럼 때로 여러분이 쓰러졌을 때 바로 내 앞뒤 좌우에 앉은 사람이 내 동무가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남을 돕는 동무, 그리고 내가 힘들 때 나를 도울 동무들이 있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 계명문화 공동체는 더욱 단단한 공동체, 어려움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 일반적으로 먼 거리를 오가는 철새들은 그 먼 거리를 가기 위해 V 자 대형을 만든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대형 속에서도 나름대로 배치되는 규칙이 있다고 한다. 새끼처럼 연약한 새들은 상대적으로 뒤쪽에 배치를 시킨다는 것 아니겠는가? 완전히 뒤면 아예 처질 수 있겠지만 여하튼 뒤에서 따라가게 한다.
- 왜 그렇게 할까? 앞의 수많은 새들의 날갯짓이 이어져서 뒤쪽에는 자연스럽게 부력이 더 커진다는 거 아니겠는가? 그래서 뒤쪽에서는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날개를 펴기만 해도 뜬다는 거다. 반대로 앞쪽은 엄청난 공기의 저항을 받게 된다. 그래서 수시로 그 위치를 교대하면서 힘을 나눠 이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뒤에서 거저 먹는 새들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소리를 낸다. 나름 응원의 소리 아니겠는가?
- 이러한 결과 그들은 혼자서는 갈 수 없는 먼 거리를 날아 갈 수 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한 외국 속담을 들어 보셨을 것이다. 로마서 12장 15절에도 이런 말이 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 기독교인이 먼저 중보하여 학교를 위해 동료를 위해 기도하고 섬기는 것을 멈추지 않길 소원한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아파하는 우리 동료를 고쳐 주시고, 부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또한 내가 어려울 때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고 돕는 사람을 붙여 주신다는 믿음도 간직하길 바란다. 함께 가는 우리 그래서 혼자서는 못 갈 그곳에 도달하는 초협력자의 삶을 살길 축원한다. Amen